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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적먹 [Question ]

A5 / 무선 / 85p / 5000원

- 10년 원로 아이돌 그룹 라쿠잔이 해체 하면서 아카시와 마유즈미의 감정 변화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어둡습니다.

 

샘플

 

1.

* * *

 

고요한 적막을 깨는 빗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우울한 것처럼 우중충했고, 화가 난 것처럼 쉴 새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의 풍경과 나 사이를 막는 단 하나의 벽인 창문으로 빗물이 튀었다가 이내 힘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용히, 쓸쓸하게 떨어져, 마치 창문이 울고 있는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내리는 것이 금방 그칠 비는 아닐 것이다. 우산도 없는데. 일정 끝날 때까지 내리려나. 사노 씨한테 사다 달라고 할까. 힘줘서 헤어 스타일링을 받는다고 해도 습기에 금방 무너지겠지. 그보다 몸이 무거워져서 싫은데. 습도는 언제나 사람을 무디게 한다. 이런 말을 하면 분명 아카시는 노인 같다고 하겠지. 아침에 나오기 전 라디오에서는 분명히 맑음이라고 했는데, 완전 오보잖아. 젠장. 눈을 감았다. 욕을 한다고 저 비가 짠! 하고 멈출 것도 아니고, 때가 되면 알아서 멈추겠지.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몸을 의자의 등받이에 깊게 기대었다. 푹신한 회의실 의자는 가격만큼이나 안락했다. 새삼 의자 가격을 궁금해 본 적도, 누군가에게 물어본 적도 없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최고가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 그 녀석을 생각해보면 절대 싼 것은 아니리라 그렇게 추측만 해보았다. 여기서 책 읽으면 딱 맞을 텐데. 그전에 잠들어버리지 않을까, 라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한 번 해본 생각이었지만 정말 점점 의식이 무겁게 눌려왔다. 아, 잠들면 안 되는데.

 

“ 치히로. ”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두 번째 정적을 깬 것은 빗소리가 아니었다. 강하게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빗소리 같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내비치는 붉은 색이 마치 불꽃처럼 흔들렸다. 가끔은 너무도 강렬한 저 빛을 담은 자신의 눈이 불타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바보 같은 생각도 했었지.

 

“ 아카시. 아니, 아카시 이사님. ”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아카시의 얼굴은 한 뼘 거리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귀신같은 놈. 눈을 한 번 깜박거렸다. 거리는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짐도 없이 그대로였다. 해외 로케 이후 보름 만에 보는 아카시의 얼굴이었다. 못 본새 한층 피곤함에 내려앉은 얼굴이 그 이후 아카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순간 반갑다고 느껴버린 것은 현재에 안주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 반가워하시는 얼굴이네요.”

“ 어딜 봐서. ”

“ 치히로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요 ”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정곡을 찔렀다. 윽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제는 독심술까지 터득했냐. 하긴 아카시라면 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는 녀석이니까. 독사 같은 녀석. 살포시 입술에 내려앉은 무게감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샘플이 아닙니다---------- 

 

  2.

삑, 삐삑, 삑, 삐삑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 손만 뻗어 자명종을 눌렀다. 시끄럽게 울려대던 자명종이 꺼진 방안에는 눅눅한 습기와 끄는 것을 잊고 자 밤새 열심히 돌았을 선풍기 소리,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뿐이었다. 이불에서 빠져나온 발에 선풍기 바람이 닿아 순간 소름이 돋았다. 급하게 발을 이불 안으로 숨겼다. 새벽 5시. 여름이 다가오고 있지만, 새벽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았다. 커튼이 쳐진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1시에 잠들었는데. 모처럼 일정도 없어 늦잠이나 자보려고 했는데 담배 때도 그러했지만, 습관이 무섭다고 자명종이 아니라도 거의 반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다. 시간에 쫓기는 일상 때문에 부지런해진 것이겠지만 손해 보는 기분이다. 이제는 이렇게 손해 볼 일도 없겠지만. 더 자볼 요량이었지만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더는 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쪽 일을 하면서 생긴 것은 짧은 수면시간과 만성피로였다. 몸을 일으켜 굳은 몸을 이리저리 꺾었다. 도저히 내 몸에서 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일찍 잠들었음에도 온몸이 무거웠다. 이제는 회복이 빠른 나이가 아니지. 꿈자리가 사나웠던 탓도 있었다. 손을 보았다. 다행인지 16세의 마유즈미의 손이 아닌 28세의 자신의 손이었다. 덜 성숙해진 소년의 손이 아닌 다부진 성인의 손. 하긴, 당연하겠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 배고프다. ”

 

허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방을 나왔다. 어두웠지만 사리구별이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싸늘하고 고요한 집 안에 실내화 끄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생각 없이 바로 주방으로 직행해 냉장고를 열었다. 서늘한 냉기와 함께 내부조명에 눈이 부셔 눈을 깜박거렸다. 깜짝 놀랄 정도로 냉장고 안에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뚜껑이 제대로 덮이지 않는 버터 하나와 반쯤 먹은 마요네즈 한 통. 심지어 저 마요네즈는 고소한으로 사오라고 했더니 아카시가 산뜻한으로 사와서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먹고 있던 것이었다. 그보다 왜 먹을 게 없지?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뺄 것이 없으면 빨리 닿으라고 재촉하듯 시끄럽게 윙윙거리는 냉장고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느릿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곧 결론을 내지었다. 장을 보지 않았다. 이제는 못 참고 경고음까지 내뱉는 냉장고의 문을 닫고 문에 붙은 종이를 보았다. 아카시이기를 바랐는데, 이번 주 장보기 당번은 자신이었다.

 

“ 아, 씨. ”

 

나 자신에게 내뱉는 것이었다. 분명 어제 귀가하면서 세이유나 들려서 간단하게 장이나 보자, 라고 생각했으면서. 바보같이 드라마 촬영 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혀를 짧게 찼다. 아무리 그래도 버터와 마요네즈는 너무 한 거 아닌가. 달걀 하나 정도만 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카시 녀석도 냉장고가 이 상태면 당번 일이 아니라도 한 번쯤은 먼저 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일까. 아니, 아카시는 냉장고 상태가 이렇다는 것을 모르겠지. 힘이 빠져가는 몸을 이끌어 자신의 방 맞은편 방문을 열었다. 방주인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깔끔한 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다를 넘어 휑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어제 아침 이불을 갈고 깔끔하게 정리해둔 그대로인 침대를 보았다.

 

“… 며칠 째냐.”

 

아카시가 들어오지 않은 지 3일째, 그리고 아카시를 보지 못한지 5일 째였다. 어떻게 3일째 인지 알았냐면, 3일 전 귀찮아서 미뤄두었던 빨래가 귀가 후 깨끗한 상태로 건조대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속사 근처에 위치한 이 고급 멘션은 아카시와 자신 둘만 쓰고 있으니 빨래를 해놓을 사람은 아카시 밖에 없었다. 못 들어 올 정도로 바빠서 옷만 가지러 왔으면서 밥까지 해놓고 갔다. … 맛있었지. 두부조림. 잠깐, 이게 아닌데. 배가 고프니 사고회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올까, 했지만 배고픔은 귀찮음을 이기지 못했다. 더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소파에 널브러트렸다. 고가의 소파는 가볍게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밥은 나중에 시켜 먹자.

 

“ 하아…. ”

 

앞으로 바빠질 테니 이렇게 느긋하게 누워있는 것도 꿈같은 일이겠지. 갑자기 피곤함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어둠 사이에 흔들리는 것은 붉은빛이었다. 아카시 녀석, 잠은 제대로 자는 건가? 어디서 자는 거지. 사무실? 호텔? 분명 바쁘다고 안 그래도 입 짧은 녀석이 밥은 안 먹고 담배만 줄로 피워대고 있겠지. 머릿속이 아카시로 가득 차고 있을 때 불쾌함에 눈을 떴다.

 

“ 왜 내가 그 녀석 걱정을 하는 건데. ”

 

자기 관리는 완벽하게 하는 녀석이다. 애초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아카시를 떠올리는 것은 마냥 바빠서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카시가 나를 피하고 있다고는 조금 웃긴 망상 때문이다. 모든 것의 우위에 서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고, 웃기다. 신경 쓰고 피할 거였다면 그런 말, 하지 않았겠지. 겨우 삭여놨던 화가 급격하게 불이 붙었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말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아카시의 말보다 그 말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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